감나무는 감나무의 이름으로 서 있다 -시인 배우식
감나무는 감나무의 이름으로 서 있다 -시인 배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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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9.1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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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들이 한꺼번에 걸어온다

지하 계단을 걸어

올라와 현관 앞 정원에 우뚝 선다.

 

손가락이라고 쓴

허공을 풍선처럼 불어

감나무 위에서 터트린다

와르르 손가락을 뒤집어쓴 감들은

하늘 위로 떨어진다 빠르게

떨어지다가 돌연,

정지한 채 공중에 떠 있다

 

감들은 어째서 중력의 법칙을

배반하고 저렇게 떠있는가

얼굴도 없는 중력이 경악한다

 

남겨진 내 손가락들이

감나무 안에서 서성일 때마다

감나무의 출입문이 닫혔다 열린다

 

문득,

열 개의 손가락이 나를 끌고

처음의 거실로 돌아온다

감나무는 붙어 있는 가지와

다시 붙으려는 감들의 고요한

아우성이 뒤섞인다

 

바깥에서, 감나무의 바깥에서

감나무를 다시 바라본다

 

우거진 가을 한가운데

감나무가 감나무의 이름으로 서 있다

별로 눈부실 것도 없는데 눈부셔서,

 

나는 소스라친다

 

거실에서 홈 시시 티브이

모니터로 죽은 까마귀 날아오르는

소리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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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식 시인 약력>

2003년 『시문학』 신인상 등단. 문학박사. 시집 『그의 몸에 환하게 불을 켜고 싶다』 외 다수. 제1회 중앙대문학상 청룡상 수상. 시 「북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각각 수록. 현재, 중앙대학교에서 ‘시 창작’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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