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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인 -시인 엄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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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20-09-16 07:5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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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소리 조차 없이 문이 열리고 그녀가 서있다.

열린 문 사이로 긴 햇살과 함께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칸나보다 붉다.

빈집은 한 송이 칸나 꽃으로 가득 찬다.

남자는 말 없이 찻물을 가스렌지에 올린다.

남자의 어깨 위에 오래된 외로움이 비둘기처럼 앉아있다.

그녀의 가방이 의자 아래 넙죽 앉는다.

어색한 침묵 사이로 장미무늬 커피 잔 두 개가 놓인다.

남자의 하얀 맨발이 식탁 아래 틀니처럼 가지런하다.

대각선으로 앉은 그들은 서로의 눈을 보지 않는다.

기인 침묵이 벽을 타고 스믈스믈 기어오른다.

남자는 일어나 의자 위에 걸쳐놓은 옷을 입는다.

이미 준비된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멘다.

현관문이 열리자, 엷어진 햇빛이

남자의 머리 위로 먼지처럼 떠돈다.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내려간다.

여름이 끝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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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문희 시인 약력>

1971년 중대문학상 수상. 2011년 한올문학회 신인상 수상(시 부문)

한국문인협회, 서울시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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