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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모하는가, 점점 미쳐가는가 -시인 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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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20-08-13 06: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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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석이 시 한 줄 노트에 쓰면

나도 백석의 시 한 줄 노트에 슬쩍 베껴 써야지

 

백석이 군불 지핀 가마솥에다가 감자를 찌면

나도 장작 패고 물 길고 줄을 서서 찐 감자를 능청스럽게 얻어먹어야지

 

백석이 나타샤와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서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¹ 할 때

나도 덩달아 당나귀를 몰고 와 삶의 가방을 내리고 얼른 오두막집에 못질하곤 눈 감고 귀 막고 일몰의 커튼을 쳐야지

 

백석이 구두를 내어 닦으면 나도 따라서 흰 고무신의 켜켜이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고

백석이 막걸리 한 잔에 구슬픈 노래를 흥얼거리면 나도 구절구절 숟가락 장단을 자유시로 맞춰야지

 

백석이 시를 쫓다가 시로 돌아간다면

나도 따라서 시의 행방을 쫓다가 시의 소굴로 돌아가야지

2.

시인이 시인일 때 할 수 있는 것은 시 짓는 일뿐이지

주어진 펜 똑바로 쥐고 총 앞에도 비굴함이 없는 사상의 편린을 취하는 일

 

시인이 시인일 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돌격뿐이지

탱크에 주어진 확고한 정력과 미사일을 쏠 힘으로 험난한 수풀 헤치고 점점 미쳐가야지

 

그래야만 한 시절 풍미하는 거지

..................................

¹「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한 구절을 빌림.

[이종근(李鍾根) 시인 약력]

부산 출생으로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과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를 마침. 그리고 한국문인협회 시창작과 2년 과정을 수료함.

계간『미네르바』에서 ‘우먼하우스’외 2편으로 등단함. 아울러 제1회『서귀포문학작품공모전』에서 ‘천지연폭포’로 당선했으며, 제2회『박종철문학상』에서 ‘대학노-트에서’로 최우수상 등을 수상함. 그리고《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시집》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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