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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항에서 -시인 박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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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20-05-29 07: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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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목의 젖은 몸이 휙휙 지나간다.

 

묵호행 기차 안, 허공에 푸른 밭

아카시아향이 물쿤 덮칠 듯 하다.

나는 철암 역두를 성급히 추억한다.

선로와 침목은 밤비에 젖어들고,

환한 등밑으로 나방들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때로 점점이 하루살이도 모이고...

기억의 벽을 타고 물방울은 흘렀다.

검은 갱구, 아련한 카바이트 불빛도 없이

글씨는 허허로이 밤비를 맞고...

나는 조용히 물기를 훑어내려갔다.

 

후미끼리:멈춤+길의 일본말로 건널목이다.

신작로옆 꼬마무당은 내 또래의 딸아이를 데리고 살았는데,

쪽마루에 종이인형처럼 앉았다가 달려와 내민

신문지에 싼 떡조각에선 짙은 향냄새가 풍기곤 했었다.

쪽마루가 있던 방문 틈으로 살짝 보이던 오방색의 천조각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나보다.

내 기억은 이렇게 후미끼리에 멈추어 있다

 

어느덧, 오월 묵호항

생선들은 봄햇살을 맞으며

바닥에서 축축히 몸을 뒤집는데...

거대한 목탄화를 집어삼킬 듯

한낮의 빛은 찬연했다.

오징어잡이 배에 매달린 백색의 불빛들

갈매기 날개는 한없이 휘황하고

 

나는 빛 속에서 길을 잃었다.

막다른 골목, 세상은 캄캄하고,

다시 탄(炭)이 수북한 역두

꽃이 보인다.

난 백합향에 얼굴을 묻고,

힘없이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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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잎 시인 약력]

2017년 월간 시see로 등단. 시집 「꿈, 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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