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공감(共感)에도 가짜와 진짜가 있다 – 공감 정치에 속지 말자
  • 김상민 칼럼니스트
  • 등록 2020-01-23 15:28:35
  • 수정 2020-01-23 15:33:39

기사수정
  • 공감은 만능열쇠가 아니며 공감이 지나치면 사람을 힘들게 하고 나라를 망친다 '공감+이성'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효율적 이타주의자'가 되는 게 삶의 지혜

 

정치의 계절이다. 4.15 총선은 전 국민의 관심사다. 과연 어떤 정치인이 뜨고, 어느 정당이 이길까? 대한민국 정치는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까?

정치인에 대한 호불호를 물어보면 많은 국민들이 ‘공감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국민의 생각을 잘 읽고 국민 편에 서는 정치인, 즉 국민과 공감하는 정치인이 뽑혀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탓에 상대방을 공격할 때도 “그 정치인은 공감능력이 부족해!”라고 프레임을 씌우는 경우가 많고, 진짜 뉴스든 가짜 뉴스든 이 프레임에 걸린 정치인은 낭패를 본다. 정치에서 공감능력은 거의 ‘절대선(善)’이자 ‘황금스펙’으로 여겨질 정도다.

정치인 가운데 공감능력이 가장 뛰어난 인물로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뽑힌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와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적자는 바로 ‘공감 적자(empathy deficit)’라고 규정했다.

“배고픈 어린아이, 해고당한 철강 노동자, 마을을 덮친 폭풍우에 삶의 터전을 통째로 잃어버린 가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관심의 범위를 넓히고 다른 사람들 즉 가까운 친구든 먼 곳에 사는 남이든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기로 선택하면, 행동하지 않기가 더 힘들고 도와주지 않기가 더 힘든 법입니다.”

공감(共感)은 ‘타인의 감정, 의견, 주장 등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기분’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공감을 ‘선행과 도덕적 변화를 일으키는 강력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미래학자인 다니엘 핑크는 “미래 사회의 인재는 다른 사람과 공감하며 조화롭게 즐길 줄 아는 사람을 영위하는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지금은 이성(理性)의 시대가 아니라 공감(共感)의 시대다”라는 표현도 즐겨 사용된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공감(共感)은 만능열쇠가 아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처럼 공감도 지나치면 사람을 힘들게 하고 나라를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

주변을 보면 유달리 다른 사람의 행복을 걱정하고, 누군가 부탁을 하면 거절을 못하며,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의 성격을 가리켜 ‘경직된 친화성’이라고 하는데, 타인에게 과도하게 관심을 가지고 타인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격의 사람들은 균형 잡힌 인간관계를 갖지 못한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적응력이 떨어지고 각종 병에 걸릴 가능성도 높다.

가슴 아픈 뉴스나 사건을 접하면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혹은 “기도하고 무사귀환을 기원합니다” 또는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는 댓글이 무수히 달린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식량이나 옷을 보내고, 아픈 사람들에게 의료 지원 활동을 펼치는 행동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게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보낸 식량은 현지 곡물의 가격을 떨어뜨려 농부들과 시장을 망하게 할 수 있다. 선진국에서 보낸 준 옷은 현지의 소규모 의류공장과 여인들의 뜨개질 같은 부업을 망하게 만든다. 경쟁력 없는 기업에 세금을 주면 당장은 일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자원(세금)의 낭비’로 이어져 국가 경제를 망가뜨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올바른 공감은 무엇일까? 바로 공감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이 스스로 일어서고 자립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공감보다는 연민의 감정을 갖기를 추천하는 심리학자들이 많다.

연민이란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면서 따뜻한 관심과 배려의 감정을 갖는 것을 말한다. 다만 연민은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이성적인 자제와 절제가 들어가 있다는 의미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감내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공감과 연민의 차이를 ‘부모의 자녀 양육’에 비유할 수 있다. 흔히 좋은 부모는 ‘아이들의 마음과 공감하고 아이들의 친구가 되는 부모’일까 아니면 ‘아이들에게서 한발 떨어지면서 때로는 엄하게 대하는 부모’일까. 자녀를 키운 경험이 있는 부모들은 대체로 ‘엄한 부모가 좋은 부모’라는 쪽에 손을 들어준다. 아이들에게 무조건 공감하고 무조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좋은 부모의 조건은 아니라는 의미다.

철학자인 찰스 굿맨은 공감과 연민의 차이를 불교 경전의 ‘감정적인 자비’와 ‘대자비(大慈悲)’에 비유했다. 공감이 감정적인 자비라면, 연민은 대자비라는 것이다. 감정적인 자비는 사람을 지치게 하므로 피해야하는 반면 대자비는 추구해야할 마음이라는 얘기다. 대자비는 연민의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무기한으로 지속되기 때문이다.

공감과 연민을 다시 정치에 적용하면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공감은 대체로 좌파 성향의 정치인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힘들고 지친 국민들에게 이런 저런 위로의 말을 해주고 나랏돈(세금)으로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노동을 존중하고, 사회적 평등을 추구하고, 개인보다 사회의 이익 증진을 우선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들은 배고픔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직접 나눠준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이러한 약속과 지원의 비용이 누구로부터 나오는지를 묻지 않는다. 오로지 현재만 살고 미래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데,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그리스 등에서 그러한 정치가 유행했다.

연민은 대체로 우파 성향의 정치인들에게서 주로 발견된다. 위로와 지원은 하지만 어느 정도는 개인이 책임을 지도록 한다. 약자를 배려하지만 강자에 대한 시샘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배고픔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일단 지원을 하면서도 ‘낚시하는 법’을 배워야한다고 강조한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수치 계산을 통해 약속과 지원의 비용이 얼마이고 누구로부터 나오는지를 따진다. 현재에 발을 딛고 미래를 바라보는데, 미국 캐나다 북유럽 등에서 그러한 정치가 주로 발견된다.

<국부론>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을 창시한 사람이라고 얘기되지만, 그의 유명한 저서 가운데 <도덕감정론>이 있다. 그는 여기서 공감(sympathy, 현재 empathy)을 매우 강조하면서도 사람에게 유용한 기질은 ‘이성과 사고력’ ‘자제력’ 등 두 가지라고 강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에 필요한 자질은 공감, 분노, 혐오, 사랑과 같은 직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에 ‘숙고나 추론 즉 이성적인 사고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칫 공감이 개인을 망치고 나라도 망치는 등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공감만 하는 사람보다는 ‘공감+이성’을 갖춘 사람, 그러한 사람을 흔히 ‘효율적 이타주의자’라고 부른다.

제대로 된 삶을 살려면 ‘무조건적인 공감을 경계하고 공감 정치에 속지 마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지금부터라도 ‘진짜 공감(共感) 즉 연민과 대자비’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공부하고 4월 총선에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
error: 관리자에게 문의하여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