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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과 새싹 – 몇 살부터 진짜 늙는 것일까
  • 김상민 자문위원
  • 등록 2019-10-14 16:22:52
  • 수정 2019-10-23 10:4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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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체의 노화보다 ‘정신의 노화’를 겪는 사람이 진짜 꼰대 롱펠로우 “나이 들어도 새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나이를 기준으로 세상사를 보면 삶의 진짜 모습을 놓친다

 

가을의 상징하는 단어로 ‘풍성(豊盛)’을 꼽고 싶다. 들판에는 추수를 맞이하는 황금물결이 삶을 풍성하게 해주고, 산에는 알록달록한 단풍이 마음을 풍성하게 해준다. 자연이 가져다주는 넉넉함 때문인지 우리나라의 한가위나 미국의 추수감사절처럼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수확에 감사하는 명절이 있다. 산에는 가을 정취를 즐기려는 단풍 행락객으로 넘쳐난다.

가을은 풍성한 계절이면서 동시에 조만간 다가올 매서운 추위를 앞두고 스산함을 느끼게 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에서 묘사되듯 가을에는 우수와 슬픔이 낙엽처럼 한 잎 두 잎 마음속에 떨어진다. 잎사귀를 잃어버린 나무의 모습은 참으로 외롭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인생과 비교하면 가을은 중장년기에 해당한다. 노년을 앞둔 사람들은 괜스레 ‘감성적(sentimental)’인 모습을 보인다. 삶에 지치고 피곤해지다보니 의욕과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다.

이렇게 삶이 지치고 피곤할 때 19세기 미국의 시인 헨리 롱펠로우의 일화를 떠올려보면 어떨까 싶다. 롱펠로우는 13세에 <라벨 연못의 싸움>이라는 시를 발표할 정도로 재능을 뽐냈고 세속적인 면에서 크게 인정을 받고 있다. 다만 가정사는 불행했다. 그는 두 명의 아내를 뒀는데 첫 번째 아내는 평생 동안 병치레만 하다가 죽었다. 두 번째 아내는 집에 발생한 화재로 급작스레 목숨을 잃었다. 롱펠로우는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펼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독을 줬다.

19세기 당시로서는 75세까지 살았으므로 크게 장수했던 롱펠로우는 나이가 들어서도 아름다운 시를 지어낼 수 있는 비결에 대해 정원의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이렇게 표현했다.

“저 사과나무가 내 인생의 스승이지요. 저 나무에는 해마다 새로운 가지가 생겨나 꽃이 피고 탐스러운 열매가 열렸습니다. 나도 항상 새로운 새싹을 틔우고 싱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해왔지요.”

롱펠로우는 삶의 굴곡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구름 뒤에 가려진 태양을 보려고 노력했다. 슬픔과 시련도 자연의 한 가닥 흐름으로 보고 긍정적인 자세로 이를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자연의 이치는 일정하다. 봄에 새싹이 돋고 여름에 무성해지며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사람은 새싹을 언제든지 틔울 수 있다는 측면에서 자연과 다르다. 그러한 새싹은 책을 읽고 지혜를 넓히거나, 육체적으로 힘든 모험에 도전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흔히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말로 ‘장유유서(長幼有序)’를 꼽는다. 나이를 기준으로 그 사람의 삶 자체를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20대, 30~40대, 586세대(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생), 60대 이상 등 연령층별로 구분해 그들을 특정한 패러다임 속에 가두기 일쑤다. 최근 586세대는 취업, 결혼, 주택마련 등에서 특혜를 받았으니 그들이야말로 ‘불평등과 불공정한 세상을 만드는 주범’이라고 표현하는 글도 많이 보인다. 열심히 ‘노오력’했으나 취업에 실패한 20~30대는 피해자가 되는 반면, 번듯한 직장을 가진 40~50대는 가해자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이처럼 연령에 따라 세대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자기합리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예컨대, 586세대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얘기되지만 80년 대 초 남성들의 대학진학률은 30% 안팎이었다. 시골을 떠나 하숙과 자취를 하면서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을 보낸 사람들도 많았다. 586세대 가운데 고졸 비율이 70%에 이르고, 지금도 많은 586세대들이 노년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나이를 기준으로 한 세대’에 끼워 맞추면 개인 개인마다 제각기 다른 삶의 진짜 모습이 가려진다. 나이에 불문하고 어떤 세대에서든지 삶이 풍요로운 사람과 삶이 힘겨운 사람이 모두 존재한다.

젊은이들은 흔히 나이가 든 어르신들을 ‘꼰대 세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육체의 노화가 반드시 정신의 노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나이어린 노인 혹은 나이 많은 젊은이’가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이다. 롱펠로우처럼 나이가 들어서 새싹을 틔울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젊은이’일 것이다.

단풍 산행을 가보면 60대 장년층들이 지리산, 설악산 등 험준한 산을 가볍게 오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젊은이들도 힘들어하는 산행을 가뿐하게 해낸다. 60대에 새로운 배움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늘 인생에 새싹을 틔우려고 노력한다. 그들을 나이만 들었다고 노인(老人)으로 볼 수 있을까.

알고 보면 단풍은 나무가 계절에 맞춰 자신을 적응시켜가는 과정이다. 추운 겨울에 대비해 불필요한 나뭇잎을 떨어내고, 다음해 봄에 피울 새싹을 준비하는 작업인 것이다. ‘단풍의 이면에서 봄의 새싹’을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나이에 관계없이 진짜 젊은이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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