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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 작가와 아름다운 언어
  • 김상민 자문위원
  • 등록 2019-09-06 15:27:51
  • 수정 2019-10-23 10:4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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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는 정신의 지문. 글은 그 사람이다. 글에서 그의 체온이 묻어난다." '언어는 존재의 집' - 나쁜 언어가 자리할 공간을 주지 말기를 부처가 욕설에 대처하는 방식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도 …

 

말과 글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너무나 중요했다. 말과 글, 즉 언어(言語)는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많은 현자들은 말과 글을 사용할 때 ‘조심 또 조심’을 당부했다.

서양의 유명한 속담으로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가 있다. 말로써 죄를 짓느니 차라리 아무 말 안하고 지켜보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는 의미다.

중국 역사에서 대표적 난세였던 남북조시대의 인물인 풍도(馮道, 882~954년). 그는 10개 왕조에서 고위 관리로서 40여 개의 직책을 맡아 30년, 재상으로 20년을 지냈다. 그는 유교적 시각에서 지조가 없고 학문도 떨어졌지만, 삶에서는 청렴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백성을 사랑했다. 그의 대표적인 처세술은 말조심이었다.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 즉 ‘입은 재앙이 들어오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말을 일생의 교훈으로 삼았다.

진(晉)나라의 부현(傅玄. 217∼278)은 ‘병종구입(病從口入), 화종구출(禍從口出)’이라고 했다. ‘병은 입으로 들어오고, 화는 입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사불급설(駟不及舌)이라는 말도 있는데, 한 번 내뱉은 말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빠른 마차로도 따라잡지 못한다는 의미다.

세상에는 돌아오지 않는 게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입 밖에 낸 말, 쏘아 보낸 화살, 지나간 인생, 놓쳐 버린 기회’가 그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말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SNS나 일반적인 글을 통해서 ‘구업(口業, 입으로 짓는 업)’을 쌓는다.

그렇다면 사람은 하루에 말을 얼마쯤 할까. 연구에 따르면 수다로 스트레스를 푸는 여성이 약 2만 단어, 말로는 여성을 이기지 못하는 언어감각이 둔한 남성이 약 7천 단어라고 한다. 이렇게 말을 많이 쏟으니 자연스럽게 ‘말실수가 많은 인생’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등의 속담이 나온 지도 모르겠다.

옛 현인들은 말을 삼가면서도 말이 ‘삼불후(三不朽)’가 될 수 있음을 얘기했다. 인간이 죽고 나면 육신은 썩어 없어지지만, 정신은 썩지 않고 영원할 수 있는 데 그게 3가지로 ‘삼불후’라고 했다. 삼불후는 ‘덕을 세우고(입덕, 立德), 공을 이루며(입공, 立功), 말을 세우는 것(입언, 立言)이 그것이다. 훌륭한 말을 남기는 것에 영원의 의미까지 부여한 셈이다.

말과 글을 통해 입언(立言)을 실천한 사람들은 역사상 수 없이 많다. 예수 공자 석가 등 성인들을 포함해 출중한 시를 남긴 시인, 역사에 길이 빛날 책을 쓴 작가들까지...

최근에 우연히 접하게 된 대하소설 <혼불>의 최명희 작가도 입언에 성공한 분인 것 같다. (고인이 된 최명희 작가의 작품세계를 만나려면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최명희 문학관>이나 전북 남원의 <혼불문학관>을 찾아보는 게 좋다. 전주에서 운이 좋으면 김용주 전북상록자원봉사단장님의 구수하고 멋진 작품 해설도 들을 수 있다.)

전주의 <최명희 문학관>에 가면 작가의 주옥같은 글을 만날 수 있다.

“글은 그 사람이다. 글에서 그의 체온이 묻어난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 나의 넋이 찍히는 그 무늬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최명희 작가는 10년 가까이 국어교사를 지냈다. 제자인 이혜순(서양화가)씨가 전한 최명희 선생님의 가르침도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너희들은 어머니가 될 사람들이니까 우리말을 바르고 아름답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 듣는 언어는 어머니의 말이니만큼 우리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바르게 가르쳐 줄 소중한 사명이 너희들에게 있다.”

최명희 작가의 언어 감각은 타고났다. 필자와 같은 일반인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최명희 작가처럼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한다면 적어도 저질 언어는 피할 수 있다.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도 “언어는 만물의 척도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는 말을 남겼다. 독일 철학자인 하이데거도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작가나 공부하는 분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세계를 넓히려고 애쓴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언어 세계 자체에 나쁜 언어가 자리할 공간을 내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름다운 언어를 통해 아름다운 인격이 만들어지고 아름다운 세계가 창조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우리 한글은 최명희 작가의 소망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다. SNS에는 온갖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한다. 언어가 더 천박할수록 오히려 각광을 받는 경향까지 나타난다. 과거에 함부로 내뱉은 말과 글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을 망치는 경우도 자주 일어난다. 정말 안타까운 현상이다.

말과 글을 뜻하는 언어(言語)에는 ‘입 구(口)’가 합쳐서 세 개나 들어있다. 품격을 뜻하는 품(品)에도 구(口)가 세 개나 있다. 말이 쌓여 인격과 품위를 만든다는 의미다. ‘막말 대잔치’를 벌이는 정치인이나 일반인들은 과연 언어가 지닌 그 엄청난 무게를 알기는 하는 걸까. 스스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거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우화’를 한 번 읽어보는 게 좋겠다.

부처님이 어떤 도시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화를 내고 욕설을 퍼부었다. 부처님이 얼굴에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화를 내던 사람이 제풀에 지쳐 욕설을 멈췄다.

부처님이 욕설을 했던 사람과 대화를 시작했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그가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다시 가져가야겠지요.”

“그렇지요. 당신은 나에게 지금 많은 선물을 주었는데 나는 하나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다시 가져갈지 말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화를 냈던 사람이 깜짝 놀라 부처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잔잔한 미소와 평화로운 모습이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부처님이 이야기했다.

“허공은 끊을 수도 없고, 깨뜨릴 수도 없고, 색칠을 할 수도 없습니다. 검은 구름도 흰 구름도 허공을 검게 하거나 희게 하지는 못합니다. 나는 나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나,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저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대합니다.”

부처님의 넓은 도량과 인품에 큰 깨달음을 얻은 그 사람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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