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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멀리, 라이벌은 가까이
  • 김상민 자문위원
  • 등록 2019-08-27 17:24:04
  • 수정 2019-10-23 10: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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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벌은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친구 같은 존재 정치나 일상에서 적(enemy)과 적수(adversary, rival)을 구분해야 치열한 '선의의 경쟁'을 통해 상호 발전을 꾀하는 게 바로 라이벌

‘입사 동기, 입행 동기, 고시 동기, 입대 동기..’

기업이나 은행, 공무원, 군대 등을 경험하다보면 늘 동기가 생긴다. 같은 시기에 같은 조직에 들어가서 단맛쓴맛을 함께 맛보다보니 매우 친밀감이 높아지는 동료가 된다. 그러다가 점차 조직에 적응하다보면 동료가 바로 자신의 경쟁상대 라이벌 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라이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2008년 미국 대선은 존 매케인(공화당)과 버락 오바마(민주당)간 양자 대결이었다. 오바마는 흑인인데다가 이슬람교도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존 매케인이 유세를 하는 도중 그를 지지하는 여성이 물었다.

“오바마가 당선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지 않습니까?”

“오바마는 좋은 사람입니다. 미합중국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우리가 두려워할 까닭은 없는 사람입니다.”

“오바마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랍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부인, 그는 좋은 가정에서 자랐으며 훌륭한 미국 시민입니다. 저와 기본적인 쟁점들에서 의견이 다를 뿐이지요, 그리고 그 때문에 지금 이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거구요.“

존 매케인은 품격을 갖춘 미국 보수의 상징이었다. 매케인은 상대방을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honor)을 잃지 않았다.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에게 패한 뒤 “오늘 밤 미국인들은 지구 위의 가장 위대한 국민이 됐다.”는 승복 연설을 남기기도 했다.

존 매케인은 자신의 저서 <사람의 품격(Character is Destiny)>에서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단지 인격을 믿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어떤 삶을 살지 정해진 사람은 없으며 운명적이라 할 만한 것은 인격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세월이 흘러 2018년8월25일 매케인은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장례식에 참석해 "매케인 의원은 우리에게 영원한 원칙과 변치 않는 진리의 의미를 알려줬습니다."라고 그의 삶을 추모했다.

매케인의 삶에 오점도 있었지만 어찌됐든 그는 미국 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매케인은 1967년 해군 비행사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격추되어 포로로 잡혔는데, 당시 북베트남은 매케인의 아버지가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것을 알고 협상을 위해 석방을 제안했지만 매케인은 이를 거부하고 동료들과 5년을 함께했다.

존 매케인은 일화에서 보여주듯이 정치에서 적(敵)과 적수(敵手)를 구분할 줄 알았다. 적은 뿌리 깊은 원한을 갚기 위해 싸우는 상대방을 의미한다. 영어로 ’enemy’이다. 적수는 힘과 재주가 비슷한 상대를 의미한다. 영어로 ‘adversary’를 뜻한다. ‘adversary’는 라이벌(rival)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분야에서 경쟁하는 맞수를 의미하는 ‘라이벌’은 ‘river(강)’에서 유래했다. 라틴어에서 리파리아(riparia)는 마을을 이루고 살만한 비옥한 땅을 말했는데, 이런 곳은 농사짓기에 필수적인 강을 끼고 있었다. 여기서 강(rivus, 리부스)이라는 말이 나왔으며, 그 강물을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을 rivalis(리발리스)라고 했다. 영어 ‘rival’은 이 ‘rivalis’에서 나온 것이다.

강을 경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많은 물을 차지하기 위해 다퉜고 때로는 소규모 전쟁까지 벌였다. (성경에도 양들에게 먹을 물을 놓고 아브라함과 조카인 롯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가뭄으로 강물이 말라갈 때는 힘을 합쳐 물을 대곤 했다. 라이벌은 바로 이 강물을 터전으로 서로 마주보고 아웅다웅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라이벌은 때로는 경쟁자이기도 했고 때로는 동료이자 친구이기도 한 존재였다.

스포츠 세계를 보면 라이벌이 늘 존재한다. 흥행을 위해 일부러 라이벌을 만들기도 한다. 프로축구 세계의 경우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미국 프로야구의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 그리고 LA다저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간 관계 등이 특히 유명하다. 국내에서는 연세대와 고려대간 고연전(혹은 연고전)이 잘 알려져 있다.

정치에서도 상대방을 적(enemy)으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적수(adversary 혹은 rival)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향을 알 수 있다.

정치에서 상대방을 타도 대상으로 보는 정치인들은 포퓰리스트나 사회주의자 성향이 강하다. 그들은 분열의 언어를 통해 ‘적 만들기(enemy-making)’를 시도하고 집단혐오를 부추긴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정치화된 대중’은 자기편이 아닌 국민을 단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싫어하고 증오한다.

반면에 상대방을 적수로 보는 정치인들은 민주주의자 성향이 강하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를 지냈고 캐나다의 자유당 당수를 역임한 마이클 이그나티에프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치인들이 적(enemy)과 적수(adversary)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적수는 꺾고 싶은 상대이며, 적은 말살해야 할 상대다.”라고 설명했다.

정치에서 상대편은 라이벌이자 적수일 뿐, 선거가 끝나면 함께 가야 할 동지다. 그런 만큼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모욕하고 막말을 퍼붓는 사람은 정치인으로서 자격이 없다. 그건 이념과 사상을 떠나 정치인으로서 자질과 품격의 문제가 된다.

사람들의 삶에서도 라이벌은 늘 필요하다. 서로 발전하기 위한 ‘선의의 경쟁자’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해치는 적은 멀리 두되, 자신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라이벌은 가까이 둘 필요가 있다. 지금 나의 라이벌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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