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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는 정부, 원폭피해 2세 지원
  • 청사
  • 등록 2019-08-08 06:08:07
  • 수정 2019-12-30 07:3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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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8월 6일(1945년)은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 원폭이 투하된 운명의 날이다.

미군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호에 실린 '리틀 보이'(Little boy)가 순식간에 히로시마를 삼켰다. 3일 후 8월 9일 '팻 맨'(Fat man)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흐린 일기 때문에 위력은 크지 않았다.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하는 패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미국이 왜 일본에 그런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알려진 원인은 일제가 중화민국을 침략하자 미국은 일제에 경제제재와 석유금수 조치를 취했다. 마치 오늘의 북한핵 도발에 대해 취한 조치와 유사한 것이다.

이에 반발한 일제가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을 전쟁의 상대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폭격은 순간이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당사자인 일제는 마땅히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죄 없는 한국인의 피해도 엄청났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80년대 중반, 필자가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한 것은 8월 무더운 여름 이었다, 마침 평화의 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무모한 전쟁을 일삼던 ‘원흉의 땅’에 평화의 종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역설처럼 느껴졌다.

전시장에는 불에 탄 인골이 산을 이루고 피 밴 옷가지, 엿가락처럼 휜 철도 선로가

시공간의 분별을 넘어 멈춰있었다. 공원 외진 곳에 세워진 한인 원폭희생자 기념비가 쓸쓸하게 서 있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숙부가 피폭당시의 참혹상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다.

다음날 요미우리 신문사에 모시한복을 입은 청년, 낯선 복장을 한 필자의 등장으로 사무실은 잠시 조용해졌다. 문화부장을 만나 미리 준비해간 ‘히로시마 시민에게‘라는 기고문을 직접 전달했다. 그는 편집회의 결과에 따르겠다는 말을 남겼지만 결국 기고문은 실리지 않았다. 그 내용의 핵심은 “일본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무기를 모두 녹여 평화의 종을 만들어라“는 것,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말의 순수한 메시지는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당시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으로 인한 한국인 희생자는 약 10만 명에 달한다. 일본 내무성 정보국 자료에 의하면, 한국인 피폭자 10만 여명, 그중 5만이 목숨을 잃었고 해방직후 4만3천명이 한국으로 귀환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와 대한적십자사는 현재 국내 생존 원폭 피폭자를 2200여명으로 파악하지만 2세 3세 후손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사도 없는 실정이다. 직접 피해자의 경우 천신만고 끝에 2016년 5월, 지원특별법안이 가결되었다 하지만 2세 3세에 대해선 정부와 일본의 무관심 속에 70년이 넘은 현재까지 방치상태에 있다. 표면적인 이유는 피폭으로 인한 유전병의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미국과 일본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무책임한 구실에 불과하다. 국가의 무능으로 방치되어 원폭피해를 입은 국민을 국가가 다시 방치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책임회피다. 그 사이 원폭 2세 등 후손의 고령화, 피폭으로 인한 유전적 질병, 경제적 소외가 깊어가고 있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내놓은 공식 발표를 보면 원폭피해 자손들은 일반인보다 유전적 질병 발병률이 수십 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나서서 피폭과 유전질병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규명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법의 미비를 핑계로 계속 외면해서는 안 된다. 국회를 설득해서 관련 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 정부가 태도를 바꾸면 당장이라도 건강보험의 확대적용과 소외된 후손들의 실질적 경제적 지원까지도 확대해야 한다 한일 과거사 청산책임을 일본에만 의존하지 말고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속하게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방치해온 정부의 무책임을 자성하는 길이다. 또 한일 양국의 방치와 고통 속에서 잊혀지고 소외된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들어주는 길이다.

(청사-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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